개 이발사

 

개 병원, 개 백화점, 개 호텔, 개 학교 등등 미국에만 오천오백만 마리 이상의 개를 고객으로 하는 비즈니스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이 중에 하나인 개 미용소, 여기서는 개 목욕으로 시작해서 털을 깎아주고 발톱도 다듬어준다. 

 

이발소 이야기를 하니 내가 13세 때 있었던 경험이 생각난다.  미국으로 이민을 가기로 부모님께서 결정하시게 되면서 나에게는 너무나도 크나큰 변화가 일어났다.  중학교 1학년을 마친 후 2학년에 들어가야 하는 나이에 갑자기 아버님이 10월 말 에 미국에 가게 되니 그 동안 학교를 계속 다닐 것이 아니라 그 사이에 몇 개월 만이라도 기술을 배우라고 하셨다.  나에게 주어진 선택은 자동차 정비 또는 이발 학원이었다. 나이도 나이인 만큼 자동차 정비학원은 너무 부담이 되기에 이발 학원을 택했다.  시골에서 금방 상경한 누나들과 금방 군대 갔다 온 형들이 학원 수강생의 전부였다.

 

미국에 올 때 쯤 되니 졸업을 하게 되고 자격증도 받았다. 비행기에 손가방 하나 들고 탔다. 요즘 9-11사태 이후로는 꿈에도 불가능한, 이 손가방에는 머리 깎는 바리깡, 굵은 빗 하나, 고운 빗 하나, 잘 드는 가위 그리고 어마어마하게 날카로운 면도칼이 13세 중학교 1년을 마친 내 이민 손가방의 전부였다.

 

미국에 도착해서 중학교 2학년 (8학년) 에 들어가야 함에도 불구하고 중학교는 매일 아침 자동차로 데려다 주어야 하는 거리이고 고등학교는 걸어서 다닐 수 있다는 결론 하에 고등학교 1학년(9 학년)에 들어가게 됐다.  우선 영어도 못하는 상황에다 엉뚱한 이유로 한 학년을 월반까지 하게 되었으니 학교 공부가 재미는 커녕 고역이었다. 돌이켜 그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암담한 청소년 시절이었다.  이때 아무런 실질적 대책은 없었지만 한국을 떠나기 직전에 다닌 이발 학원이 내 나름대로의 마음의 평화를 가져다 주었다.  “에이 쌍…. 학교 공부 안되고, 대학도 못 가고, 정 먹고 살게 없으면 ‘깎사’(이발사)는 될 수 있고 먹고 사는 데는 문제없어”  이런 식으로 자신을 위로하며 미국 생활에 첫 발을 내딛었다.   지금도 이발소를 지나칠 때마다 그 시절을 기억한다.

 

기회가 있어서 아버지께 여쭈어 보았다 ‘왜 이러한 손 기술을 어린 나에게?’ 아버지께서 ‘남자는 아무데서나 먹고 살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라고 만 말씀해 주시었다.  그 분이 돌아가신 후 서류정리를 하는데 나온 그의 기술 자격증만 해도 나열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배관, 전기, 크레인작동, 트럭운전, 목공 등등 국가에서 내준 기능공 자격증과 또 미국 정부가 한국 민간인을 대상으로 내어준 수료증 등.  이것들 외에 한국에서 해병대 특수부대 출신으로 몸에 밴 ‘나는 할 수 있다. 무엇이든지 할수있다’(Gung Ho) 근성 등.  이런 것들이 미국에 덜커덩 와서도 친척 한 사람도 없이 미군 부대에서 같이 근무하시던 몇 분과의 관계가 전부였음에도 전혀 위축되지 않고 당당하게 우리 가정을 이끌어 가시는 원천이 되었던 것 같다.

 

개 이발소에서든지 사람 이발소든지 나는 3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정 필요하다면 이발사 자격증을 생각하며 언제고 다시 뛰어들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런데 이러한 마음가짐과 생활태도를 성경에서도 찾아 볼 기회가 있어서 흥미진진하게 읽은 적이 있다.

 

신약성경을 가장 많이 기록한 사도 바울은 당시에 상당히 알아주는 스승 밑에서 확실한 학력과 또 재력도 단단한 집안 출신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학력에 모든 것을 걸지는 않았다. 그에게는 남들이 별로 인정해 주지 않는 손 재주, 손 기술이 있었다. 천막을 깁는 기술, 요즘식으로는 집을 수리하는 Contractor정도의, 언제나 써 먹을 수 있는 손 기술이었다.  자신이 선교 여행을 하면서도 그는 그의 먹고 사는 수단을 학력에서 찾지 않고 천막 수리기술을 통해서 찾았다. 그는 항상 어디에 있든지 그 천막 수리업을 바탕으로 먹고 살며 자신의 사역을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내 자신을 사도 바울과 견주는 것이 부담은 되지만 최소한 사도 바울, 나의 아버지, 내 경험 등을 뒤돌아 볼 때 세상 살이에 자신감과 만족감을 줄 수 있는 것 중 최우선이 손 기술이라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깊은 생각 없이 내 아들에게도 지난 몇 년 동안 기회 날 때마다 망치질과 톱질 등 목수로서의 최소한의 기술은 다 전수해 주었다. 결과로 별 볼일 없는 기술이건만 그 나이의 아이로서는 당당하게 ‘나는 먹고 사는 데는 문제없어’라는 마음 가짐을 불어 넣어 준 것 같다.

 

이 방법이 유태인들 자녀 교육에 꼭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요즘에 안 사실이다.  이러한 것을 우리 기독교인들은 멋있는 단어로 Tent-Maker(자비량 선교사)라고 한다. 나 자신도 내 사업체를 통하여서 나에게 주어진 사역을 감당한다.  지금의 사업체가 아니더라도 언제든지 깎사(이발사)로서 내 사역을 꾸려 나갈 준비는 항상 되어 있다.

 

요즘 신학교를 졸업한 목사님들이 너무나 많기에 그들을 감당하기 위해서 많은 교회들이 세워진다. 이것은 좋은 현상이다. 단 전체적 기독교인 수는 점점 줄어든다 하니 수학적으로 영 이해도 되지 않고, 한편으로는 기독교 앞날에 먹구름이 끼는 것 같다.  모든 문제에 유일한 답 하나로 해결책을 다 찾을 수는 없다.  단지 나에게는 손재주, 이것이 어렸을 때부터 미국 생활 적응과 대학 전공 결정, 사업시작 그리고 사역시작 하는 모든 시점마다 많은 자신감과 대책방안을 제시해 주었다.

 

지금 당장 면도칼과 가위 그리고 바리깡을 내 손에 쥐어준다면 과연 제대로 쓸 수가 있을지 궁금하다.  그러나 나는 위에서 능력 내려주시는 분의 도움만 있으면 불가능은 없다고 장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