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 목걸이

 

미국 군대에서는 군인들의 개인 고유번호가 적혀있는 목걸이를 Dog Tag(개 목걸이)라 부른다.  군인으로서는 유일한 신분증이기에 샤워할 때도, 잠잘 때도, 제대할 때까지 항상 목에 걸고 잠시도 빼놓을 수 없는 이 개 목걸이. 전쟁 시 불의의 사망을 당했을 때는 이 개 목걸이가 최후의 신분증이 되는 것이고 만약 시신을 챙기지 못할 경우 대신 목에 걸린 개 목걸이를 가지고 나온다 들었다.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는 어떤 목걸이가 걸려 있는지 궁금하다. 아마도 교인들이 가장 많이 걸고 다니는 것은 십자가일 것이다. 여기 십자가에 관한 문제는 후에 다루기로 하고 우선 유형이든 무형이든 어떤 모양의 것이든지 간에 걸려있는 Tag에 무엇이 쓰여있으며 또 어느 소속으로 기록되어 있는지 궁금하다. 기독교인일 경우 하늘의 생명책에 기록되었을 때 목록 고유넘버가 적혀있을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한번 인침을 받았기에 지워지지 않는 것도 확실하다. 단 이 목걸이를 항상 걸고 있는지가 궁금하다. 앉아서 쉴 때, 일어서 있을 때, 걸어 다니며 활동할 때 다시 말해서 집에서, 학교에서, 연애하는 자리에서, 직장에서, 사업체에서, 손님 대접하는 자리에서 등 모든 자리에서 우리는 이 기독교인의 목걸이를 걸고 다니는가? 아니면 필요할 때 즉 주일 예배 때만, 성경공부시간 아니면 사람들 앞에 나설 때만 이 목걸이를 걸고 다니는지 한번쯤은 생각해볼 일이다.

 

십자가 - 언제부터인지는 모르나 십자가 상징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아마도 처음에는 기독교인들끼리 서로 자신들의 정체를 알리기 위해서 사용했을 수도 있고 또 개인적으로 십자가에 흘리신 보혈이 너무나도 감사해서 스스로 늘 기억하기 위해 사용했을 수도 있다. 이렇게 사용되던 십자가 상징이 다음 세대에 물려주면서 주는 사람에게는 상당히 의미 있는 것이지만 받는 사람에게는 별 의미가 부여되지 않은 그냥 기념품일 뿐이다. 

 

이 십자가를 목에 걸고 다니는 사람들 중에 이 십자가가 어마어마한 고난의 상징인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특히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은 당시 사람들에게도 너무나 혹독한 처형으로, 문서로 자세히 남기지 못할 정도의 가장 비인간적인 형벌이었다. 채찍질 40번은 사형 선고였기에 39대만 맞으신 예수님. 채찍 끝에는 낚시바늘과 같은 날카로운 물체를 달아서 최대한의 아픔을 준다. 역사적으로 이것을 연구한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예수님이 받으신 채찍 형은 사람의 등살이 다 으깨어진 상태가 되고 많은 경우에 뒤에서 내장이 보일 정도로 살이 다 묻어나는 형벌이라고 한다. 이 상처에 의도적으로 광목으로 만든 옷감으로 덮어주었다가 그 다음날 피와 살이 다 엉기고 말랐을 때 다시 한번 고통을 주기 위해 억지로 벗기는 아주 비인간적인 형벌인 것이다. 그리고 그 후에 십자가에 못 박히는 형벌. 십자가에 박히는 못 또한 일부러 날카로운 못이 아닌 뭉뚝한 못을 양팔과 발에다 박는다. 몇 시간 매달려 있으면 고통이 점점 더해지는데 더욱 힘든 것은 허파에 물이 차기 시작하므로 물에 빠진 사람처럼 숨쉬기가 힘들어 허파를 늘리기 위해서 발돋움을 하는 가운데 못 박힌 발에 더 큰 고통이 간다는 것이다. 이렇게 사형선고 중 가장 처참한 사형방법의 상징인 십자가를 목에 장식품으로 걸고 아무 것도 모르며 다니는 이들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십자가의 진정한 의미를 모르는 이들은 결론적으로 지옥에 가게 되는데 거기서 겪는 형벌이 어느 정도로 혹독할지는 모르지만 그 기간이 영원하기 때문에 사실 더 무거운 형벌이 되는 것이다. 유행 따라 사는 것도 제멋이지만 최소한 지옥 행은 면했으면 좋겠다.

 

요즘 세상에 우리는 무슨 목걸이를 하고 살고 있는가? 

많은 사람처럼 아무런 의미 없이 고통의 십자가도 모양으로 걸고 다니는지 아니면 진정한 기독교인의 목걸이를 했지만 필요와 상황에 따라 자주 목에서 벗어두고 있지는 아니한지?

 

목에 건다는 표현을 조금 바꾸어서 내 목을 맨다는 문장도 동일한 의미가 있다. 영어로는 Vice, 한어로는 못된 버릇을 표현할 때 사용될 수 있다. 예를 들면 도박에 목을 건다, 정치에 목을 건다, 배짱에 목을 건다 등으로 부정적 의미일 경우와 정반대로 어떠한 주장이나 종교, 신념 또는 사역에 목을 걸 때는 내 생명과 바꿀 준비가 된 각오를 보이고자 할 때 사용된다. 내 목을 건다고 선포했을 때는 책임(Accountability)까지 지게 되므로 정말 비장한 각오 없이는 함부로 내놓지 못하는 문장이다. 따라서 인도하는 자가 이런 말을 할 때는 심각함을 받아들여서 특별한 경우 외에는 가능한 한 따라갈 줄 아는 아량도 길러야 할 것이다.

 

우리 교회의 전임 목사님께서 자신은 이중 문화권 사역에 목을 걸었으나 우리 교회에서는 환경이 맞지 않아 꽃을 못 피웠고, 새로 부임하신 교회에서는 미국인 성인들이 많기에 성공적 사역을 하신다고 말씀하신 것이 생각난다. 현재의 담임 목사님께서는 2세 사역에 목을 건다고 선포 하셨고 지금도 그 선포에 맞추어 교회의 모든 자원을 총동원하여 총력을 기울이고 있으니, 이 사역이 성공적으로 펼쳐지는 것은 시간 문제일 것이다. 어떤 일이건 목을 맬 정도의 각오로 중단하지 않고 나아갈 때는 결코 실패란 있을 수 없다.

 

내 자신을 돌이켜 본다. 나의 목에는 유형이든 무형이든 기독교인으로서의 목걸이가 걸려있나? 그리고 주야로 항상 이 목걸이가 걸려있나? 또 나의 목을 걸 만한 사역을 찾아서 뛰고 있나?  동역자들이 목을 걸고 뛰는 사역을 강 건너 불 보듯 구경만 할 것인가 아니면 그들의 목맨 사역에 동참할 것인가?  참으로 부족한 나의 믿음을 다시 한번 회개한다.

 

당신의 목에는 어떤 목걸이가 걸려 있습니까?   당신의 목을 어디에 걸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