겁쟁이 개

 

멕시코에 와서 처음에는 힘든 육체 노동을 하기에 피곤하고 힘들어서 살 좀 빠지나 하였다.  작년에는 3파운드가 늘었다.  올해도 2파운드는 무난히 찌는 느낌이다.  몸무게가 느는 이유는 간단하다.  우선 마음이 너무나 홀가분 하고 일하는 분위기가 단순하며, 해지면 잠자고, 해 뜨면 일어나고 등등 합당한 이유가 있다.  그 중 가장 확실하고 정확한 이유는 먹는 것이다.  끊임없이 영양가 있는 음식을 부모들이 계속 먹인다.  아침, 점심, 저녁 그 사이 사이에 쉬지 않고 스낵으로 배를 채워준다.  점심은 각자가 싸는데 나는 고기를 넉넉히 집어 넣는다 – 동네 개들과 나누어 먹으려고. 

멕시코 가정마다 개가 없는 집이 거의 없다.  거기에다 주인 없이 떠돌아 다니는 개까지 합치면 수도 없이 많다.   이 떠돌이 개들을 유심히 관찰해 보았다.  이 개들의 표정은 밝지가 않았다.  그리고 항상 꼬리는 내려져 있었다.  주위의 쓰레기통을 뒤지고 또 뒤지고 5분 전에 자기가 뒤진 쓰레기통을 다시 한번 혹시 하며 뒤진다. 

 

개들은 같은 몸무게의 인간에 비해 두 배 이상의 음식을 섭취해야만 된다. 그러니 하루 종일 먹을것을 찾아 헤메어야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배 고프고 지친 개들에게 고기쪽을 던져 주었다.  그 반응이 예측과 상당히 달랐다.  막 달려들고 싸우면서 먹을 줄 알았는데 우선 개들은 모두 도망을 갔다.  그리고 시간이 잠시 지난 후에 와서야 먹었다 – 그 것도 눈치를 상당히 보면서.

 

아마도 누군가가 무엇을 던지면 대부분 돌멩이였기에 본능적 보호의식인 것 같았다.  동네 아이들끼리 노는 것을 볼 때, 누구도 개와 같이 놀아주는 적은 없고 고작 개들을 막대기로 때리고, 돌 던지고, 개들을 못살게 구는 애들 밖에는 없었다.

 

먹는 것을 주어도 도망가는 개들.  이들을 내 고유의 휘파람으로 불러 모았다.  다들 나만 쳐다보지 가까이 오지를 못 했다.  내가 그 들에게 가까이 가면 다 도망을 한다. 꼭 일정한 거리를 두고 지켜본다.

 

쓰레기통을 지키는 자기들끼리도 우선은 피하고 무슨 소리만 나면 무조건 도망을 갔다가 제자리로 온다.  특히 작은 강아지들은 전혀 먹을 차례가 오지를 않는다.  우리 그룹의 학생들에게 요청을 했다. 점심 먹고 남는 것을 다 내게 가지고 오라고.  다들 욕심을 부려서 점심을 만들었는지 많은 양의 음식이 모였다.  이것을 다 모아서 개들에게 특히 못 얻어먹는 강아지들에게 주려고.  달리기를 잘하는 Richard와 Collin 학생에게 강아지들을 모아 오라고.  여러 번 그 들은 모아 보려고 했으나 옆으로 빠지고, 이리 비끼고, 저리 튀고 영 힘만 든다. 

 

점심시간이 다 지났기에 모아 두었던 음식을 강아지들이 있는 쪽으로 던져 주었다. 많은 개들이 우선은 도망을 갔다가 다시 덤벼들어서 순식간에 모든 음식이 없어졌다. 당연히 강아지들은 먹지도 못하고 다른 개들에게 물리고 쫓겨 다니기에 바쁘다.

 

이 때 해결책을 생각 해 보았다.  내가 스페니쉬 개의 언어를 구사 할 수만 있다면, 이 강아지들에게 큰소리로 “야! 여기 너희들을 위해서 상 차려 놨어.  와서 실컷 먹어! 저 큰 개들이 너희들을 물지도 않을 것이고, 또 너희들이 전에 먹어보지 못한 맛있는 것들이야! 햄 조각, 살라미, 터키고기, 초코렛과자, 정말 맛있는 것들이야!” 안타까워 하면서 이 음식들을 강아지들에게 먹여 줄려고 따라 다니면 다닐수록 그 들은 도망간다.  할 수 없어 근처에다 던져주어도 땅에 떨어지는 것마다 큰 개들이 와서 날름 날름 먹어버린다.  이것을 구경하는 학생들도 안타까워서 발을 동동 구른다.

 

이 장면을 보면서 오래 전에 Paul Harvey라는 유명한 시사문제 해설가 가 한 말이 기억이 난다. “ 하나님이 하늘에서 이 세상을 내려다 보니 수 많은 사람들이 주인 없이 우왕좌왕 하면서 항상 피해의식 속에 살고 있었다.  무슨 소리만 나도, 조그만 재앙만 와도 우선은 도망가고 아무도 못 믿고 살아가고 있었다.  몰골은 먹지도 못하고 여러 가지 병과 정신 빈약으로 정말 보기에도 불쌍한 인간들이었다.   이 들에게 도움을 주려고 천국이라는 곳을 마련해 놓고 여러 모양으로 초청하였다. 그때마다 인간들은 자신들이 지은 죄가 있고 또 자책감에다가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였으므로 전혀 의사불통이었다. 하나님께서 결정을 내리시기를 자신이 직접 말을 하면 무서워서 도망을 가니 대신 선지자를 통해서 대화 해야겠다고.  그러나 이 좋은 계획도 인간들이 마이동풍이고 기껏해야 작심삼일 이므로 인해서 무산 되었다. 인간을 사랑하는 하나님은 기어코 최후의 방법을 동원하였다. 자신의 독생자를 인간으로 보내시어 직접 말씀을 전하고,  더 확실하게 하길 원하여 예수로 하여금 직접 모범을 보이시고…..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었다.  공평한 하나님이 인간의 죄를 무책임하게 방관 할 수 없기에 대속물로 자신의 아들인 예수에게 이 세상의 모든 죄를 그 에게 위임하신 후, 최대의 고통 경험과 사망으로 인류의 죄 값을 치르고 삼일 후에 부활하게 하시어 하늘의 집으로 다시 불러가신 하나님”

 

아무리 노력해도 하나님의 은혜를 정말 이해 할 수 없으며 이해를 부분적으로 한다 해도 전혀 갚을 길이 없기에, 오직 감사함 마음으로 주님의 부르심 들을 때 부끄럽지 않고, 무서워서 숨지 않으며 영생의 길을 달려가는 예수쟁이가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