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가 되고 싶지 않은 개

 

어머니께서 기르시다가 우리에게 주신 개가 있었다. ‘Hot Dog’라 이름을 지어준 땅개였다. 우리 집에 놀러 와 그 개를 본 사람들은 다 아는 사실이지만 그 개는 너무나 특이한 개였다. 세상에 어느 개가 나무에 오를 줄 알고 또 담 위로 걸어 다닐 줄 알겠는가. 많은 분들이 이 이야기를 믿지 못하다가 Hot Dog가 나무 타는 것을 직접 보고는 입을 다물 줄 모른다. 그러나 Hot Dog가 처음부터 특이한 개는 아니었다. 이 개는 공놀이를 아주 좋아하여서 쉬지 않고 한 시간 반을 공 던지기 놀이를 한 적도 있는, 공놀이라면 지치지 않는 개였다.

 

하루는 실수로 큰아들 주형이가 던진 공이 옆집 뒷마당으로 넘어갔다. 공놀이를 중단하고 저녁이 되었다. 우리 개가 보이지 않아 찾다 보니 옆집에서 끙끙대는 소리가 났다. 혹시 해서 넘겨다보니 우리 Hot Dog이었다. 오라고 부르는데 오지를 못하고 안달이다. 할 수 없이 옆집을 앞으로 돌아가서 개를 데리고 왔다. 이 같은 일이 여러 번 반복되면서 그 이유가 궁금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 무심코 밖을 내다보다가 그 광경을 목격하였다. 개가 안간힘을 쓰며 몸을 이리 저리 틀면서 나무 가지를 하나 하나 올라가다가 떨어지면 다시 시작하고... 마지막에 담 높이까지 가서는 담으로 다리를 하나 걸치고 고양이처럼 담 위에 섰다. 내가 이름을 부르면서 뛰어나가 보니 개가 반가워서 나에게 오려고 몇 발짝 떼다가 균형을 잃고 옆집으로 떨어졌다. 다시 앞으로 돌아가서 개를 데리고 왔는데 개 입에는 공이 물려있었다.

 

왜 이 개는 나무를 타고 담장 위를 걸으려고 생각했을까? 답은 간단하다. 공을 물어다가 다시 공놀이를 하려고. 더 이상의 다른 이유는 없을 것이다. 보통 다른 개들은 담장 밑을 파거나 자기가 뛰어 넘을 만한 곳을 찾는다. 그런데 Hot Dog는 자신이 개라는 것을 망각했든지 아니면 담장 위를 돌아다니는 고양이나 다람쥐들을 보고 자신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나무에 오르기 시작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결과는 늘 같았다. 내려오는 방법을 모르는 개는 떨어지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고양이도 높이 올라가 놓고는 못 내려와서 소방대가 고가 사다리를 동원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아마 Hot Dog도 떨어질 줄 아는 배짱이 없었으면 소방대의 도움을 받았어야 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공놀이가 좋아도 어느 정도지 개가 개의 본분을 잊고 고양이 행세를 하려 하니 부상은 물론이요 죽음도 가능한 죗값을 치러야 하는 것이다.

 

우리 인간들은 어떠한가?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 의도하신 바가 있기에 남녀를 만드셨고 세상에 모든 것을 우리로 하여금 다스리도록 하셨다. 그리고 번성하여서 이 세상을 채우라 하셨다. 이러한 사명을 띠고 태어난 우리 인간은 제대로 그 역할을 하고 있나 생각해볼 만한 점이다. 요즘 신문과 방송의 뉴스 중 가장 많이 차지하는 부분이 동성애 문제이다. 이 동성애 문제 자체가 문제가 아니고, 이 동성애를 하나님의 창조의 뜻인 양하려는 인간들의 노력이 문제가 되는 듯하다. 지난달에도 세계적으로 ‘자랑스러운 동성애의 달’로 축제 분위기에서 새로운 동성연애자 보호법이 많이 통과되었건만, 오늘 신문에 또 동성애 기사가 실렸다. 아르헨티나에서 처음으로 동성애자들끼리 가진 결혼식 소식.  그 결혼식에서 감격에 겨워하는 동성애자들을 기자 회견하던 중, 이 동성결혼을 합법화하기 위해 싸우다 죽은 동료들을 추모하는 순서도 가졌다. 그 중 한 동성애자는 45세에 이미 에이즈로 죽었기에 이 결혼식에 참석을 못했다고 아쉬워하는 자칭 새 신랑 신(부)랑(?)들. 왜 이렇게 요즘은 인간이 되고 싶지 않은 인간들이 많아지고 개의 삶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많은 지 알다가도 모를 세상이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어떤가? 인간들은 본능과 감정 그리고 일반상식 등을 통해서 인간답게 살게 하셨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의 일반상식은 시간과 장소 그리고 시대가 바뀜에 따라서 달라지는 예가 허다하다. 그러나 성서는 쓰여진 당시나 2000년이 지난 지금도 변함이 없는 확고부동한 문서로서 주셨다. 역사적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성서가 완전하지 않다고 주장하기 위해 애를 써 왔기에 그런 사람들 하나 하나의 주장을 연구하면 할수록 성서의 완전함을 더욱 믿게 된다. 이렇게 완전한 성서를 지침서로 받은 우리 기독교인은 과연 기독교인답게 살고 있나? 아니면 기독교인이 되고 싶지 않은 기독교인으로서 살고 있나? 한번쯤은 생각해 볼만한 주제이다.

 

Hot Dog에게서 배운 것을 정리해본다.   기독교인이 되고 싶지 않은 기독교인의 삶은 참으로 쉽지가 않다. 자연스럽지 않기에 더 힘들고 수십 번 노력해야 겨우 목적에 가까이 간다.  그 과정상 또 내려가는 방법이 없기에 떨어져야 할 때가 항상 있다. 그럴 때는 다치는 것은 당연하고 죽음도 감수해야 한다. 더욱 한심한 것은 그 목적이 별로 대단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에서는 확실히 말씀하신다. 기독교인이 기독교인답게 살 때는 앞길이 훤이 열리고, 고양이와 다람쥐는 나무도 잘 타고 담 위로 쉽게 걸어다닌다.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셨기에 당연히 힘 안들이고 할 수 있다. 우리 인간이나  기독교인도 하나님이 만드신 원리대로 살 때에 모든 것이 자연스럽고 안전하다.

 

인간이 되고 싶지 않은 인간이 내 주위에 있나? 오늘그에게 전화해야겠다.

기독교인이 되고 싶지 않은 기독교인이 내 주위에 있나? 오늘이 지나기 전에 연락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