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돗개의 특성

 

한국 사람들에게 가장 사랑 받는 종류의 개중 진돗개를 뺄 수 없다.  옛날부터 사실 일지는 모르나, 서울에 살던 개가 전라도로 이사를 가서 서울까지 다시 찾아왔다, 혹은 몇 년 동안 떨어져 잃었던 주인을 알아 보았다는 등 많은 전설적 이야기가 있다. 

워낙 똑똑하다 보니 거의 사실처럼 들려진다.

 

진돗개는 작은 몸집을 가지고도 사냥에도 사용되고, 집을 지키는 데에도 많이 사용이 된다.  단 개싸움에는 (투견) 용으로는 별로 사용되지 않는다.  사납기도 하고 영리하기도 하여서 기질은 있으나 단 몸집이 다른 종류에 비해서 상대가 안되는 것이다. 턱이나 코 등의 모든 자체가 투견용으로는 별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사냥에 쓰여지나 찾아보니 엉뚱하게도 우리 한국민족 특히 이민 온 우리1세들과 공통점을 몇몇 있음을 발견했다.

 

몸집과 그 외의 모든 조건이 싸움에 유리하지는 않았으나, 투지력 즉 성질은 싸움 개보다 한 수 높다.  사냥에서 직접 물고 늘어지는 것보다는 목적물을 몰아서 주인이 와서 끝내게 만드는 것이다.  자신이 직접 성공은 못 할 지라도 간접적으로 과정상 반(1/2)성공은 한 것이다. 

 

우리 이민자들은 우선 영어가 딸리고 우리의 외형과 문화도 너무나 본토박이 미국인과 다르다.  그렇기에 우리가 직접 이 백인위주의 사회에서 싸움의 승산은 적다.  단 우리 한국인, 특히 이민 1세에게는 본토사람이나 이민 2세에게서는 찾아 볼 수 없는 투지력이 있다.  몇몇 크게 성공한 사례를 제외 한다면 이 투지력은 “성공한다” 혹은 “성공 할 수 있다” 가 아니고 사실은 “실패는 못 한다” 혹은 “실패는 무슨 짓을 해서든지 피할 수 있다”, 더 실질적으로 표현한다면 “이국만리 미국까지 와서 주저 앉을 수 없지” 이다.   그렇기에 많은 1세 부모와 2세 자녀간의 말 다툼 중 종종 나오는 말이, 부모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야 임마 너희들은 영어도 잘하고 학교도 여기서 나왔는데 그 까짓 것도 못해?  너희 부모들은 일자무식에 영어도 한 마디 못하는데 너희들 다 먹여 살렸어! ” 얼마나 실감나는 대화인가!

 

이런 식의 대화가 오갈 때 부모님들께서 한 발짝 물러주시면서 이해를 해 주어야 할 점이 있다.  우리 1세들은 꼭 미국에서 ‘성공’이 아니고 ‘생존’에 기준을 두었기에 서로의 관점이 다르다는 점을.  성공을 하기 위해서는 모험을 해야 한다.  모험에는 항상 위험이 따르게 마련이고 그렇기에 당연히 많은 사람들이 덤비지 못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을 하면 또 부모님들의 반박은 ‘미국 이민 오는 것 자체가 모험이었다고’.

절반은 동의한다. 단 우리 부모님이나 필자의 경우에는 모험보다는 사실 배수진을 친 것으로 보는 것이 맞는다고 할 수있다.  마지막 기회이기에 성공을 이루기보다는 실패를 피하기 위해서라고.

 

내 사업체만 보아도 그렇다.  지난 20여 년간 전자시대의 수도인 Silicon Valley에서 Software 사업체를 운영하다 보니 어떤 단체에서 이런 저런 이유로 ‘올해의 기업인’이란 영광스런 상까지 주었다.  이것을 나는 굉장히 창피하게 받았다.  남들처럼 모험을 한 것도 아니고 또한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멋지게 운영을 한 것도 아니고 다만 죽지 않으려고, 실패만 면하면 된다는 식의 운영을 하다 보니 년 수는 꽉 채워지지만 실력은 별로 없고 또한 먹고 살기 겨우 되는 식의 경영은 성공과는 거리가 아주 먼 구멍가게 사업체이었기에.  그저 나름대로 성서적 운영방식을 고집 하다 보니 다는 못 지켜도 부분적으로 남들에게 부끄럽지만은 않을 정도의 사업체가 된 것이다.

 

부모님이 이민수속을 하는 동안 필자는 한국서 중학교 1학년은 마치고 6개월간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나 이발학원에 다녀서 이발사 면허증을 따가지고 미국에 들어오게 되었다. 내 이민보따리는 푸른색 손가방에 오늘날에는 상상도 못하는 날카로운 면도칼 한 자루와 바리깡, 가위 둘 그리도 빗 두 자루가 전부였다.  미국 도착하자 마자 시작한 미국 학교생활은 9학년 고등학교로 월반 했기에 쉽지가 않았다.  많은 한국학생들이 쉽게 여기는 수학조차도 따라가기가 어려웠고 물론 영어는 한국에서 배운 중학교1학년 실력이니 당연히 어려웠다.  몇 달 동안 학교생활에 시달리다 하루는 아버지께 부탁, 아니 항의를 했다.  “왜 나를 한국에 남겨두지 않고 미국에 데리고 와서 고생을 시키시냐?”  그리고 “지금이라도 한국에 보내달라”고.

 

그런 일이 있고 며칠이 지난 후 동네에 있는 멕도날드 음식점에 가서 점심을 먹으려고 줄을 서 있는데 전기가 정전됐다.  개스로 음식은 계속 만들 수 있으나 전자 계산기가 되지 않는 상황에서 수학도 아닌 산수의 수준인 더하기를 미국 종업원들은 감당 못하고 당황하며 앞뒤를 못 가리고 우왕좌왕 하고 있었다.   내 점심 주문을 받아서는 더하기 계산에다 세금 곱하기를 제대로 못해서 쩔쩔매는 백인 종업원에게 계산을 도와주었다. 한국에서 몇 급인지는 기억도 안 나지만 주판부에서 3-4년 배운 덕택에 암산으로 쉽게 도와 주었다.  이것을 보더니 옆에 있는 백인 종업원까지 얼굴에 비굴한 웃음을 띄우며 계산에 도움을 요청했다.  내가 주문한 음식을 받아서 먹으며 생각에 잠겼다. “야! 이 양키들 이 정도밖에 안되면 최소한 나는 먹고 살수 있다”라고 마음을 굳히고 그날 저녁 아버지께 “아버지, 저 여기 미국에서 한번 버텨 볼게요”  지금도 생생히 기억 나는 나의 어린 시절 그리고 나의 “Will to NOT fail”의 결정적 순간이었다.

 

다음 세대에게 이것을 어떻게 전해야 될 지는 모르겠다. 

“최소한 이 정도는 해라?” 혹은 “너는 여기서 머무르지 말고 모험을 해라?”

에라 모르겠다!!! 지들이 알아서 하겠지. 나는 조선산 진돗개이니 이것으로 만족한다.

내 다음 세대는 과연 어떤 종류의 개와 비교 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