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룩 강아지

 

한국에서 살던 집 근처에 쌀가게가 있었다. 그 쌀가게에는 나비라는 이름의 고양이와 바둑이라는 이름의 얼룩 강아지가 있었는데, 그 얼룩강아지의 어미도 얼룩 개였다.

 

하루는 이 얼룩 강아지 바둑이가 깊은 생각에 잠겼다. ‘나는 하얀 강아지인데 검은 점이 박힌 것일까, 검정 강아지인데 하얀 점이 박힌 것일까?’ 매일 매일 하얀 개인지 검정 개인지 고민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어미인 얼룩 개는 아들 바둑이가 고민하는 것이 안타까워서 멀리 서울에 있는 영적 지도자인 고참 개에게 찾아가 카운슬링을 받으라고 권유하였다. 세월이 흐를수록 바둑이의 고민은 점점 더 하여져 갔고 결국 바둑이는 큰 마음을 먹고 영적 지도자를 찾아 나섰다.

 

영적 지도자를 만난 자리에서 바둑이는 물어보았다. “Am I a white puppy with black spots or am I a black puppy with white spots? (저는 하얀 강아지에 검은 점이 박힌 것인가요 아니면 검정 강아지인데 하얀 점이 박힌 것인가요?)”  자세히 듣고 있던 영적 지도자는 깊이 생각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어 하시는 말씀, “You are who you are! (너는 너이니라!)” 이 말씀을 처음들은 바둑이는 이해가 안돼서 고민을 하다 며칠이 지난 후에야 그 뜻을 깨닫고 하산하였다. 

 

목이 빠져라 기다리던 어미 개가 돌아온 아들 바둑이에게 물었다. “선생님께서 무어라고 하시던?” 바둑이 왈 “엄마, 나는 하얀 강아지인데 검은 점이 박힌 거야.” 어미 개는 더 궁금해져서 다시 물었다. “선생님이 뭐라고 하시기에 그런 결론이 나왔니?” 그러자 바둑이 왈 ‘You are who you are.' 라고 하셨단다. 더욱 더 궁금해진 어미 개가 다시 묻자 답답해진 바둑이는 엄마에게 자세히 설명을 하였다. “선생님 말씀이 내가 검정 강아지인데 하얀 점이 박혔다면 ’You is who you is' ( ‘니는 닌기라’- 흑인 고유의 사투리 발음) 라고 말씀하셨을 거예요. 그렇지 않기 때문에 나는 검은 점이 있는 하얀 강아지예요.

 

우스갯소리이지만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볼 것이 두 가지 있다.

 

첫째 - 미국에 사는 우리 한인 2세들은 미국인으로서 한국인의 문화에 살고 있는가 아니면 한국인으로서 미국이라는 환경에 묻혀서 살고 있나 하는 것이다. 국적 소속감 - 이것을 진심으로 깊게 생각해보지 않은 부모들은 절대로 2세들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아무리 미국말(영어)을 잘하고 옷을 백인들(혹은 흑인들)처럼 입어도 우리의 노란 살결은 바뀌어지지가 않고 또한 많은 경우에 우리의 기본 정신 사상도 바뀌어지질 않는다. 지난 2002년 월드컵 축구 시합때 미국에서 자란 한국아이들이 한국을 응원하며 열광하는 모습이나, 어릴 적에는 먹지도 못하던 김치를 대학교에 가더니만 없으면 밥을 못 먹는다고 할 정도도 변하는 2세들.

 

이러면 어떻고 저러면 어떠냐고 반문하시는 분들이 있다. 이 분들에게 드릴 정답은 사실 없다. 나 자신도 한때는 여기에 대해서 나름대로의 의견이 있었다. 특히 한국에서 중학교 1학년을 마치고 미국에 와서 고등학교를 다니기 시작했기에 양쪽을 다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이 글들을 쓰기 전까지는 나는 내 자신이 1.5세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1.2세 정도 된 것 같다. 내 나름대로의 의견이란 사실 편견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적응하기 쉬운 쪽, 나에게 이익이 되는 쪽만 따르다 보니 확실히 미국인도 아니고 완전한 한국인도 아닌 어중간한 혼합형이 되었다. 오히려 이런 짬뽕인들을 위한 문화가 있다면 혼돈이 덜 할 터인데 사실 그나마도 역사가 짧아서 그렇지 못한 현실이다. 요즘은 또한 국경을 뛰어넘는 결혼이 보편화되었기에 더욱 더 복잡하다. 결론적으로 볼 때 이 모든 것이 아주 큰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온 세계가 점차 글로벌 해져가는 요즘 단일 민족만 주장하던 나 같은 사람도 바뀌었으니...

 

둘째 - 기독교인으로서 세상 속에서 어울려 살고 있는가 아니면 세상인(비기독교인)으로서 교회 울타리 안에 살고있는가? 다시 말해서 자신이 완전히 영생이 있는 것을 확신한 상태에서 기독교인의 세계관을 가지고 세상의 일(먹고 사는 일)을 결정하는가 아니면 그냥 친구들이 가고 교회에 가면 대접해주는 것이 좋고 또 본인도 확실치는 않지만 교회에 가면 좋은 말도 듣고 천당에 가는 최소한의 보험이라도 사놓는 기분으로 헌금도 하고 하는지... 우리 각자의 영적 소속감이 정부에서 영주권 아니면 시민권 주듯이 확실했으면 좋겠다.

 

영적 소속감은 국가 소속감과는 조금 다른 면이 있다. 우리가 매일 살아가는 데 있어서 특별히 나타나지도 않고 또한 크게 차이가 나지도 않기 때문이다. 단 마음속에는 갈등이 쌓이기 시작한다. 진심이냐 위선이냐로 시작해서 궁극적으로 영생에 관한 것이기에 상당히 중요한 결정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나는 나름대로 확실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완전치도 못하고 세상사람들이 보기에도 별 볼일이 없으나 예수님의 공로로 영생을 얻고 나름대로 갈등 안에서 하루하루 주님에게 가까이 가려고 노력하는 별 볼일 없는 예수쟁이와 예수님과의 관계는 없으나 교회에서는 헌금도 잘(많이)하고 세상사람들에게 존경 받는 멋있는 사람 중에 어느 것을 택하겠느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식은 죽 먹기다. 당연히 ‘예수쟁이’.

 

세상이 단순히 모두 하얗고 모두 검은 것이 아니다. 항상 섞여 살고 있다.

이 섞여 살고 있는 세상에서 우리는 영적 소속감을 분명히 하여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