닭 쫓던 개

 

예수를 처음 믿고 누구나 경험하는 전도와 봉사에의 열정.

그때는 누구에게나 자기가 만난 예수를 전하고 싶어서 눈만 뜨면 주위 사람들을 귀찮게 한다. 나 자신도 예외는 아니었다. 대학교 때 영어1A반의 숙제를 하다가 묘하게 만난 예수에게 무엇인가를 드리고 싶은데, 당시에 돈도 없고 특별한 재주도 없고 내가 가진 것은 시간뿐이었다.  주일은 Lord's Day라고 부르는 주의 날이니 주일을 빼고 나면 남은 것은 매주 144시간이었다. 이중 십일조로 14.4시간을 교회에 드리기로 작정했다.

 

신중하지 못한 내 성격대로 어느 수요예배 때 교인들 앞에서 이런 나의 결심을 선포해버렸다. 나는 주일날을 빼고 매주 14.4시간을 교회에 헌신하겠다고. 그런데 이 시간을 채우기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음악 목사님과 의논하여, 음치인 내가 성가대에 앞으로 3년간 참석하기로 작정하였다. 그 후 3년간 빠지지 않고 성가대 연습은 물론 모든 공연에 참석했다. 물론 한번도 소리를 낸 적이 없이 다만 입만 뻥긋뻥긋 했다. 재미있는 것은 많은 성도들이 나 때문에 은혜를 많이 받았다고 하는 사실이다. 다른 성가대원들은 악보만 보기에 바쁜데 나만은 자신만만하게 지휘자와 눈을 맞추고 또 관중에게도 웃음으로 찬송했기에(사실 나는 아직도 악보를 볼 줄 모름) 그러나 성가대 연습만 가지고는 시간이 채워지지를 않았다. 그래서 수요예배, 철야예배, 토요 새벽예배 등을 다 참석하여도 시간이 모자랐다. 마지막 수단으로 금요 철야예배 후 교회 본당 뒤에서 잠을 자고 그 다음날 토요일 새벽예배를 참석하니까 억지로 시간이 채워졌다.

 

대학교 내에서 성경공부반을 만들어 한때는 상당히 많은 학생들이 참석하였고 또 우리교회의 황규빈집사님을 포함한 몇몇 기독교인으로서 성공한 사업인들을 초청해서 강연회도 마련하고 등등 부지런히 뛰었다.

 

결과는 무엇인가?

 

항상 행사가 끝나고 나면 닭 쫓던 개 마냥 허무하기만 하였다.

잡힐 것 같은 마음에 이 뚱뚱하고 날개는 있지만 날지 못하는 닭이 어디서 갑자기 그런 힘이 나는지 획 지붕 위로 날아오른다. 이와 같이 전도하려고 요리조리 몰아서 교회에까지 초청해 놓으면 정작 주일날에는 어김없이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빠지는 닭 같은 사람들. 닭 쫓는 개는 그 닭을 잡아먹으려고 하는 것이니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한다고 치자. 반면에 나는 이들에게 영생을 주려는 것이지 전혀 해를 끼치려는 것이 아닌데... 이 닭 같은 사람들이 어느 때는 원망스럽다.

 

우리 집에는 닭이 세 마리 있다. 9년을 데리고 살면서 가끔 내 부주의로 닭장 문을 열어 놓으면 나와서 돌아다닌다. 동네에 고양이들이 많다 보니 불안해서 자기 집에다 넣으려고 잡으러 이리저리 뛰다 보면 결정적인 순간에 담 위로 뛰어 오른다. 한참 뛰다가 포기하고 집으로 들어가면 저녁에는 자기 집을 찾아 들어가서 모이를 먹고 있다.

 

내가 아무리 열심히 전도하고 봉사를 하더라도 막바지에 이르면 닭 쫓던 개 모습이 되곤 하는 나를 돌이켜 볼 때 한때는 한심하기도 하였다. 

 

왜 이렇게 내 수고가 헛수고로 돌아가나?

하나님은 이렇게 사는 나를 어떻게 보실까?

나름대로 위안을 얻기 위해 자부해본다. 나의 임무는 열심히 쫓아다니는 것이요 언젠가는 닭이 자기 집에 스스로 돌아오든지 아니면 다른 사람의 손에 잡히든지 할 테니까. 엄연한 의미에서 이 닭 쫓는 개의 연습은 하나님이 나를 더 크게 쓰시기 위하여 준비시키는 과정이고 닭이 잡히고 안 잡히는 것은 내가 상관할 것이 아니라고 자문자답 해 본다.

 

한때는 예수님을 처음 믿고 열심히 전도에 불이 붙으신 분들 아무리 ‘닭 쫓던 개’ 되는 기분이 들더라도 실망치 마세요. 심는 자가 있고 물주는 자가 있고 또 자라게 하는 이는 따로 있습니다. 닭도 쫓는 자가 있고 잡는 자가 있고 또 먹는 자가 따로 있습니다.

 

성경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  영혼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전도서 3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