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견

 

얼마 전 돌아온 탕견이란 글을 쓴 기억이 난다.  우리집에서 기르던 몰라가 열린 문에 나가서 밖에 떠돌다가 근처 국민학교에서 선생님에게 일단 잡힌 몰라는 목에다 줄을 묶은 덕분에 선생을 인도해서 집으로 돌아와서 착하고 똑똑한 개 대접을 받은 적이 있다.  문이 열려있으니 당연히 나갔다가 돌아오는 본능은 좋은 개나 나쁜 개를 구별하지 않아도 어느 개나 할 수 있다. 단 탕견, 즉 좋고 나쁘고를 돌아온 것과 상관없이 본질적으로 다른 면을 찾아보았다. 

 

한국 그리스도인에게 돌아온 ____ 하고 물으면 자연스럽게 탕자라고 대답이 나온다.  영어로는 Prodigal ____하면 Son 이란 대답이 나온다. 신약 누가복음 15장 본문에 근거를 둔 내용의 비유에 제목을 붙일 때 영어에는 돌아온 이란 표현이 없다 때문에 탕자가 작은 아들인지 큰 아들이지 쉽게 구분이 되지를 않는다. 그러나 한어로는 당연히 탕자는 집을 나갔다가 돌아온 작은 아들이다. 한어와 영어 차이만은 아닌 세계관 혹은 문화의 차이를 볼 수 있다. 당연히 아버지의 속을 섞이고 재산을 말아먹은 작은 아들이 탕자라 불리는 것이 당연하다.

 

나 자신도 교회를 떠나서 갈팡질팡 살다가 막판에 이르러서야 교회에 다시 찾아오는 사람들을 돌아온 탕자라고 남들이 표현할 때 별 거부감 없이 동의했다.  그리고 당연히 나같이 교회에 30여 년간 꾸준히 교회를 참석하는 것이 탕자가 되지않는 바른 길로 알고 지냈고 또한 교회와 문화적으로도 배웠다. 사실 교회 생활을 30여 년 동안 커다란 변함없이 빼먹지 않고 참석한다는 것이 무척이나 힘들고 아주 열심 없으면 불가능한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반면에 많은 사람들에게 교회를 빠지지 않고 꾸준히 생활하는 것처럼 부담도 없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것도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정리해 보면, 교회를 얼마나 꾸준히 다니고 오래 다녔다는 사실만을 가지고 탕자가 되고 안 되는 결론을 낼 수는 없다.

 

집에서 개를 기를 때 당연히 문이 열린 사이로 개가 나가서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할 주인은 없다. 단 문이 열려 있으면 당연히 나갔다가도 돌아오는 것이 개들이다. 진짜 좋은 개는 밖에 나갔다 사고 치지 않고 돌아오는 개이다. 오히려 집에 꼭 박혀있으면서 주인집 애나 물고 또한 집안에 오가는 손님을 물어서 사고치는 개가 문제되는 개이다.  이 예화가 돌아온 탕자에 대해 아주 정확하게 설명을 하지는 못해도 무조건 말을 잘 듣는 자식은 효자, 그리고 조금이라도 창의적이기에 사고를 치는 자식은 탕자라고 딱지 붙이는 경우를 돌이켜 볼 기회를 만들고자 한다.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하고 자기 마음대로 살다가 궁지에 몰리니까 겨우 정신을 차리고 아버지에게 돌아온 작은 아들을 탕자라고 부르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그렇기에 우리 한국문화에서 돌아온이라 불렸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도 솔직히 대부분의 사람들이 작은 아들처럼 이렇게 살아보고 싶은 충동이 있는 것도 배척을 하지는 못한다. 오히려 작은 아들의 행동이 죄 가운데 쌓여서 사는 우리 인간들의 자연적 선택이라 할 수도 있다. 절대로 작은 아들이 한 행동을 정당화 하고 싶지도 않고 또한 이것을 장려는 더욱더 못한다. 오직 이러한 상황에 있는 사람들에게 작은 아들처럼 궁지에 빠졌을 때 아버지를 기억하고 아버지의 긍휼을 받고자 돌아오는 것은 아주 좋은 방법이며 아버지의 관대한 처사에 몸둘 바를 모르고 자식의 대우를 받을 자격도 없으니 하인취급 해달라는 아들의 겸손 또한 배울 점이다.

 

한어로 보면 돌아온에 포함되지 않았기에 당연히 탕자로 불리우지 않은 큰아들을 살펴보자. 그는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함은 물론 사회에서 보는 모든 시각에 착하고 좋은 맏아들이었다. 그러나 그의 진짜 속사정은 말썽꾸러기 동생이 다 말아먹고 집과 아버지 품에 되돌아 왔을때 어떻게 행동했나를 들여다 보면 조금 이해가 된다.  그는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순종보다는 사회나 자신이 터득한 처세술에 강했다고 설명할 수 있다. 즉 외적으로는 착한 아들이지만 내적으로는 불만이 가득하고 오히려 가출한 동생을 부러워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

 

만약 큰아들이 정말로 효자였다면 그리고 정말로 아버지를 사랑했더라면 상황이 달랐어야 했다. 자신이 사랑한다는 아버지의 제일 원하는 소원을 들었어야만 좋은 아들이 될 수 있는데 큰아들은 아버지의 소원을 무시했다. 아버지의 첫째 소원은 작은 아들이 무사한 것이었다. 이것을 잘아는 큰아들은 자신이 직접 혹은 하인을 시켜서라도 당연히 동생의 거처를 알아서 동생을 집으로 데리고 왔어야 할 임무를 소홀했다.  그리고 아버지의 둘째 소원은 자신은 물론 큰아들도 말썽꾸러기 막내를 사랑 해주기를 원했다.  아마도 어머니께서는 벌써 돌아가셨기에 아버지와 아들 둘뿐이었다. 돌아온 막내를 사랑은커녕 오히려 시기를 한 장남은 아버지의 둘째 소원도 무시했다. 

 

교회를 오래 빠지지 않고 다니신 분들에게 이런식으로 표현하는 것이 죄송하다.  그러나 사실 얼마나 열심히 전도해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에게 돌아올 수 있게 노력했나? 그리고 하나님도 무한히 사랑하는 모든 세상 죄인들을 얼마나 진심으로 사랑했나? 이 두 가지의 관점에서 볼 때 너무나도 많은 큰아들 같은 탕자들이 오늘날의 교회에 꽉꽉 차있다.

 

사실 집을 나갔다 돌아온 막내 아들은 당연한 탕자다.  그러나 교회에 열심히 그리고 꾸준히 참석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처럼 집은 나가지 않았으나 아버지가 원하는 것을 훤히 알고 있으면서도 모른체하고 지내는 맏아들 또한 엄연한 탕자다. 이러한 원리를 터득했기에 영어에서는 돌아온 표현을 안 했다고는 할 수 없다. 오직 탕자는 여러 모양으로 존재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꼭 집을 나간 자는 나쁘고 집에 지키는 자는 좋다고 결정을 하기 전에 우선 우리 자신을 둘러봐야겠다.

 

우리 개 몰라는 탕견 처럼 집을 나가서도 사고를 치지도 않고 또 집에 있으면서 주인을 즐겁게 해주니 아주 효견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