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자

 

요즘에는 막내딸 해피(Happi) 과자와 케이크를 만드는 재미 때문에 수시로 우리집 오븐은 초콜렛, 메카데미아, 오트밀 레이즌 등의 과자를 구워낸다. 덕분에 전혀 예상치 아니하던 맛있는 과자나 케이크를 얻어 먹는다.  얼마 전에는 해피에게 무숙자들에게 나누어 과자를 부탁했는데 거의 밤을 세워가며 만든 열성과 수고도 만만치 않았다.  때문에 가끔 실수로 만들어진 맛없는 과자도 아무 말없이 먹어주어야 딸과의 좋은 관계가 유지될 같아서 울며 겨자 먹기이다.  일단 손으로 집은 과자는 먹어버린다. 

 

하루는 퇴근하고 집에 들어 섰는데 아무도 집에 없었다.  아내와 식구들을 기다리며 몰라 집안에 들여놓고 같이 TV 보다가 무심코 커피 테이블 위에 있는 과자봉지를 열어 커다란 과자 하나를 집어 들었다. 입에 넣고 씹는데 오래되어 그런지 상당히 딱딱하게 굳은 과자였다. 어머니도 그렇고 전에 돌아가신 외할머니도 이빨은 아주 튼튼하기에 이것을 물려받은 나도 이빨은 치과에 평생 것이 손가락 안에 든다. 과자가 딱딱한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으나 맛은 별로이었다. 하나를 먹고 TV 계속 보다 보니 저녁을 기다리는 것이 길어 같아서 하나를 집어 들었다. 설탕이 많이 들어가지 않아서인지 훌륭한 맛은 아니었지만 저녁 식사 때까지 요긴한 스낵이 되었다. 잠시  애들을 학교에서 데리고 아내가 차려준 저녁식사를 맛있게 했다.

 

며칠이 지난 아직 밖에서 놀던 몰라 집안에 들어 오겠다고 마구 짖는다. 하도 시끄러우니까 아내가 나에게 테이블 위에 있는 과자를 하나 던져 주라고 한다.   소리를 듣는 순간 맙소사…’ 딱딱한 과자가 아내가 개에게 주려고 Trader Joe 라는 자연식 전문 식품점에서 구입 과자인 것을 이제야 알게 것이다.

 

며칠 내가 저녁을 기다리며 먹은 과자가 딱딱하고 덤덤한 맛이었는지 이제야 이해가 되는 것이었다. 먹을 당시는 그저 테이블 위에 며칠 있었기에 말라서 딱딱하고, 덤덤한 맛은 딸이 설탕을 넣어서 혹은 아내가 몸매가 요즘 넓어져가는 추세를 생각해서 건강 스타일 과자일거란 정도의 추측이었다. 최악의 경우 딸의 실패작이나마 그래도 억지로 먹고 딸에게 이것도 맛이 있다고 아양 떨려고 하려던 나의 계획이 완전히 빗나가는 찰나였다.

 

돌이켜 생각하면 자신도 간사하다.  배가 고파서 먹을 당시에는 전혀 느끼고 나름대로 이해하려고 노력을 하면서 먹던 음식이 정작 과자라는 것을 알고부터 맛없게 느껴지고 괜히 헛구역질하는 증세까지 보인다. 과자를 만드는 과정 그리고 들어가는 재료들을 보면 사람들이 먹는 과자의 재료와 특별히 다를 것이 없다. 그저 사람들이 먹을 것에는 설탕이 조금 들어가서 씹어먹기 쉽고 딱딱한 뿐인데.

 

이러한 상황이 음식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다. 교회생활과 영적생활에서도 얼마든지 일어난다. 같은 설교 내용도 어떤 목사가 설교를 하느냐에 따라 차이가 수도 있지만 진정 차이는 설교를 듣는 사람의 마음 가짐과 상황에 따라서 완전히 다른 결론을 초래한다. 내가 좋아하는 목사님이 설교하는 내용을 듣고 은혜를 많이 받는 때가 얼마나 많은가. 특히 목사님이 금방 초빙이 되어서 아주 좋은 관계 그리고 서로 이해하려는 상부상조의 조건에서는 어떠한 설교가 강단에서 나와도 아멘으로 받아드리던 이들이 시간이 지나고 관계가 조금 식어지기 시작을 하면 듣는 설교에 대한 불평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고 전에 들어서 분명 은혜를 받았던 설교까지 꼬투리를 잡기 시작하는 것이다.

 

미국 경제 공황 많은 미국인들이 음식을 돈이 없어서 음식으로 허기진 배를 채웠다고 읽은 기억이 난다. 우스게 소리지만 어떤 한국 분은 개밥 깡통에 그려진 그림을 보고 개고기 통조림(보신탕 깡통)인줄 알고 먹었다고 한다.사실 음식이 과히 우리 인간들에게 되지는 않는다. 맛이 좋지는 않고 영양가치가 인간 음식에 비교할 없지만 그래도 이것을 먹고 죽지는 않고 오히려 경우에는 사람이 생명 보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칼로리와 영양가는 얼마든지 음식으로도 충족 시킬 있다.  이러한 음식을 모르고 먹을 때는 가만있고 일단 음식이라고 알고 다음에는 괜한 선입감과 편견 때문에 구역질이라도 것처럼 수다를 떤다.

 

다시 교회생활로 돌아 가보자. 평상시에 커다란 문제없이 정기적으로 듣던 설교가 하루아침에 급변하지는 않는다.  오직 설교자와 듣는 이의 사이에 생긴 껄끄러운 관계가 변수가 것이다.  혹은 듣고 은혜를 많이 받던 설교가 하루는 설교자가 대단한 학위를 소유한 자가 아니고 보통 수준의 학력 밖에는 없다는 소문을 듣는 순간, 마치 설교의 내용이 바뀌고,여직 받았던 은혜가 무산되는 상황이 일어난다.  아니면 설교자의 고향이 어디어디라고 하면 무슨 개벽이 일어난 것같이 어쩐지 그럴 알았어 아니나 달라…”  등등 사실 자신의 선입감을 털어 놓는다.  이런 현상을 조금 깊숙이 들여다 보면 설교 내용은 그저 그래도 열심히 기도하며 준비한 설교이니 만큼, 최소한 우리의 영적 배고픔을 얼마든지 채울 있는 충분한 영양가치가 있는 것인데.

 

교인 각자가 자신이 성경을 직접 파고 들어도 이해하기 힘들고 게을러서 영적 양식을 전혀 먹지 못하고 배고픔에 시달리고 있다는 표현이 너무나 많은 사람들에게 적용이 된다. 당연히 자신도 여기에 포함이 된다. 그렇다면 배고픈 자가 감히 맛있어 맛없어 따질 때인가? 우선 많이 주워 먹어야지. 맛있는 것만 골라 먹다가 영양실조 걸리고 혹은 굶어 죽으면 손해는 누구며 잘못은 누구에게 있나?

 

너무 선입감과 편견, 혹은 기분에 의해서 영적 건강을 해치는 일을 범하지 말아야겠다.